<풍전등화의 조선 '그들'이 있었다 > 4편 분조
임진왜란 임시정부 선포하던 날
선조 25년 (1592년 4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20만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 왔다.
당시 조선은 전투경험도 없었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로
신무기와 오랜 통일 전쟁으로 군사훈련이 잘 되어있던 왜군에게
쉽게 부산지역을 점령당했다.
결국 궁궐을 떠나 선조는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피난을 떠난다.
임진왜란 발발 약 한달여 만에 피난을 떠났던 평양성까지
함락당하며 조선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 임시정부로 탄생한 분조.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거의 내용을 찾아 볼수 없었던
조선 최초의 임진왜란 임시정부 분조(分朝) 의 이야기가
역사저널 그날에서 베일을 벗게 된다.
*조선 최초의 임시정부 분조(分朝) 의 탄생
1592년 6월 왜군은 파죽지세로 대동강, 개성 을 넘어 평양까지
무인지경으로 입성하게 된다.
당시 영변에 머물던 선조는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넘어가
명나라에 피신할 생각까지 갖고 있었지만,
신하들은 한나라의 임금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피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였고 끝까지 항전할것을 주장 하였다.
이에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눌것을 결심, 조선최초 임시조정 "분조"가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세자 광해군은 10여명의 신하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하게 되고 변변한 호위 군사나 궁인도 없던 열악한
상황에서 분조가 전란 극복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된다.
*분조,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영변을 출발한 분조는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이천에 도착하게 된다.
분조의 소식을 듣고 전.현직 관리들이 이천으로 모이게 되었고
팔도 감사들의 보고서는 이천의 분조에 올라오게 된다.
분조는 군령을 정비하고 격문을 붙여 의병들의 왜군과의
항쟁에 용기를 북돋는 역할을 한다.
분조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각지에 퍼져서 산발적으로 싸우던 의병들이
서로 연계하여 본격적으로 왜군에 맞서 싸우게 되고
순변사 이일 등이 이끌고 온 병력으로 군사 작전도 수행하게 한다.
이들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황해도 평안도를 주둔하던 왜군을
치게되고 서서히 전쟁의 흐름도 바꾸게 된다.
임진왜린 당시 왜군과의 항전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며 전쟁의 방향을
조선쪽으로 우세하게 흐름을 바꾸게 된 분조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던 그들의 활약상을 살펴본다.
*분조. 임진왜란 초기 골든타임을 사수하다.
1593년 1월 9일 왜군에게 빼았겼던 평양성을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탈환한다.
전세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우세로 점점 자신감을 얻은
선조는 분조를 폐할것을 명한다.
임진왜란 기간중 가장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1년
제대로 조정의 기능을 하지 못한 무능한 선조와 조정 신료들
그 참혹한 현실에서도 조정을 대신해 항전의 불씨를 지폈던 분조
임무수행 7개월 만인 1월 20일 분조는 정주에서 선조가 이끄는
대조에 합류하며 분조는 사라지게 된다.
이후에도 광해군은 전쟁터에서 군사를 지원하고 돌보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실질적인 분조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히 나간다.
임진왜란 당시 혼란에 빠져 나라를 잃을 위기에서 왜군과의 항전에
구심점이 되었던 분조 .
6월 21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역사저널 그날>에서 위기의 조선을
임시정부로서 구해낸 진정한 리더쉽의 주인공들 분조에 대해 재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