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운명을 건 마지막 전투 황산벌!!
백제의 계백과 신라의 김유신이 국운을 건 승부를 벌이나 백제는 운을 다한다.
신라 5만 대군에 맞선 백제의 5천 결사대!
서기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침공을 단행한다. 13만 대군의 당나라는 고구려와 가까운 백제 덕물도에 머물고, 신라는 사비성 대신
북쪽의 백제 남천정으로 진격한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척 백제를 교란하려는 것. 당시 조정의 내부분열로 혼란한 백제는 연합군의 허수에 속아 넘어간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백제 조정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동쪽 군사요충지 탄현을 통과해버린다.
기만전술로 허를 찔린 백제는 사비성으로 오는 마지막 길목,
황산벌에 계백 장군을 보낸다.
■ 처자식을 희생시킨 계백의 ‘결사항전’
백제의 명장 계백은 마지막 전투임을 직감하고 결전을 위해 처자식도 희생시키고
5천명의 소규모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다.
이에 맞서는 신라 김유신 장군의 병력은 5만명!!
누가봐도 전쟁의 승패는 불에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운이 걸린 백재의 항전은 놀라웠다.
신라의 5만대군을 맞아 4전 전승을 거둔것이다.
발이묶인 신라는 초조해 질수 밖에 없었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계속하여 진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바로 화랑 관창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16세 화랑 관창이 나서 백제군의 진영으로 향한다. 창 하나로 적진 한가운데에 뛰어든 관창. 그 용기를 높이 산 계백이 관창을 살려 보내지만, 그는 또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는다.
말의 안장에 매달려 돌아 온 관창의 목, 참혹한 어린 화랑의 죽음 앞에 신라군은 투지를 불태우고 결국 백제군은 전멸당하고 만다.
백제는 황산벌전투 후 열흘 만에 700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
백제의 멸망으로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황산벌 전투.
이 전투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지 역사저널 그날에서 되돌아 본다.